회색노트 60

미완성 독백

비내리는 가을 하늘은 정갈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지금은 바람이 불고 잿빛 아스팔트 위로 플라타너스잎들이 바스락거리며 나뒹군다. 쓸어모아 태우지 않으면 그것들은 결국 끝도없이 굴러갈 것만 같다-회귀의 불가능성. 나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보단 사물들의 불귀현상을 더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에 대해서 특히 그러했다. 한없이 캄캄해지는 마음 뿐이었다. 잊자, 잊자, 잊어버리자... 수도없이 되뇌이며 창가를 서성거려 보았지만 끝끝내, 마음에 이끼처럼 낀 불안은 가셔지지 않았다. 실은 그녀가 나를 떠났다. 이미 6개월 전의 일이었는데, 그럼에도 사건적이지 못한 나에게는 그것이 꿈만같이 느껴졌다. 사건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이기적이거나 혹은 지혜롭지 못해 불행해진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특성이었고, 그점에 있어서는..

회색노트 2005.10.02

모노로그

좋은 영화는 살아갈 용기를 주지. 희극이건 비극이건 그래. 영화가 너무 슬퍼서 손수건 한장을 다 적실지라도 훌륭한 관객은 힘차게 극장문을 나설 수 있어. 왜냐하면 그건 영화니까.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니까. 그걸 믿는다면 영화 속의 현실과 맞부닥치게 되더라도 용기를 내어 일어설 수 있을거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지. 이런 생각들이 내 미약한 生에 활기를 주지. 실은 썩 훌륭한 관객이 아니더라도 모두들 나의 경우와 같을거야. 단지 그걸 모르고 있거나 깨닫지 못할 뿐이야. 하지만, 지금부턴 모두가 적극적으로 삶의 활기를 추구하길 바래. 좋은 영화가 혹은 괜찮은 소설의 현실 속을 용기있게 들어가 보길 바래. 그래서 기쁨이 무한해질 수 있도록 힘껏 숨쉬게 되기를 간절히 바래. 그래서 내가 웃을 수 있게,..

회색노트 2005.10.02

회상

그여자는 참 선이 고왔다. 갸날픈 얼굴형에 긴 허리, 긴머리, 그리고 긴 목선이 참 고왔다. 요즘처럼 미인이 많은 세상이 그리 예뻤다고 말할 순 없으나 나에게는 그녀의 그 긴 몸선들이 참 곱게 느껴졌었다. 나는 언젠가 그녀와 보았던 베트남 영화 에서 그녀의 목선을 또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 가느다랗고 가냘퍼보이는 그녀의 목선에 손이 가려는걸 가까스로 참았던 기억은 늘, 나를 피식 웃게 만들었다. 더불어 그녀의 표정은 늘 고요하면서도 쉽게 알아챌 수 없는 동요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푸석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녀는 얌전해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많은 호기심과 예술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틈만나면 나를 끌고 미술관과 영화관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중 종로의 한 화랑에서..

회색노트 2005.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