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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고 직장 경력이 꽤 쌓이면서부터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온전히 잘 살고 있는걸까?
사실 그랬다.
직업이 특수하다보니 퇴근 후의 모임이란 게 대부분 직장 사람들이었고
그런 사람들하고만 만나다보니 퇴근 후에도 늘 일에 관한 대화가 많았던 것.
그렇게 어영부영 또 몇년을 살다보니 우연찮게 사람들의 관심이 적었던 신설부서에서 일을 하게되었고 마침 사무실도 동떨어져 있어 자연스럽게 쓸데없는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점차 정기적인 직장내 모임에 대한 내 관심도 시들해지면서 의도치않게 고립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 바로 지금이야. 한번 해보자.
나이들 수록 모임에 자주 참석하고 인간관계를 넓히라는 많은 처세서들의 조언을 거부하고 온전한 내 시간을 가져보자는 평소의 생각을 실천해 보기로 한 것.
그렇게 2년이 시간이 흘렀다.
퇴근 후엔 무조건 집으로 향했고
빈둥거리면서도 혼자 만의 시간을 즐겼다.
결과는, 대체로 만족.
일에 대한 집중력이 높아졌고
성과도 있었다.
가끔씩 외롭긴 했지만
퇴근 후 혼자 즐기는 시간의 즐거움도 꽤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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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모처럼 퇴근 후에 대학 동기들을 만났다.
오랫동안의 자족 생활에서 벗어난 즐거운 일탈.
오랫만에 만남을 제안해온 그 친구는
평소 자기발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터.
오늘의 만남 또한 그의 계획에 내가 동참한 것으로
일주일 중 하루는 직장이나 비지니스와 무관한 사람들과 만나 순수한 인간관계를 누려보자는 취지라고 했다.
셋이 모여 정말 편안하고 즐겁게 세시간을 공유했다.
녀석은 퇴직 후의 목표와 그걸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는지에 대해
마치 꼭 인정해달라는 식으로 구구절절 이야기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이야기에 대해 잘하고 있다는 식의 칭찬과 격려로 응답.
두 사람과 달리 나는 좀더 인문학도 출신에 가까운 생각을 제시했다.
이를테면,
무언가 목표를 정하고 그걸 달성하기 위해 사는 것의 성취감에 대해 공감은 하지만 그 즐거움은 유한하다. 그건 칭찬할 만한 인생이긴 하나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치 정상을 정복하는 것이 등산의 유일한 즐거움인냥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그저 그 순간 내가 아직 건강해서 산을 탈 수 있다는 자체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마치 도닦는 사람처럼 큰 욕심없이, 아주 미미한 것일지라도 내가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고 만족하면서 유유자적 살고 싶다.
대충 이런 얘기들이었던 것 같다.
물론 퇴직 이후의 내 삶에 사학연금이 든든한 빽이 되줄 것이라는 점과 내 성향이 직접 성공보다 남의 성공을 돕는 것에 더 큰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했던 얘기였다.
경쟁적인 환경에서 청춘을 보냈고 현재도 그렇게 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두 사람과 달리 나는 비교적 경쟁이 덜하고 상대적으로 내 주관에 의해 일을 할 수 있는 여지가 큰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보니 이렇게 생각이 많이 차이가 난다.
물론 토론이나 논쟁을 유발하여 누가 옳은가를 따지는 차이는 경우가 아니라
서로의 생각과 입장에 대해 얘기해보고 가까운 미래에 대한 각자의 희망사항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는 그런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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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얘기를 보고 누군가는 나를 아직 세상물정을 잘 모른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요즘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하고 있고
그래서 우리 셋 모두가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가진 것도 없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일이 어디 있겠는가?
돈이나 직위 등에 목표를 두면 그것을 이루었을 때 성취감은 느낄 수 있어도 그것은 행복이라고 말할 것은 못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목표가 달성되면 더 큰 목표를 이루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눈에 보이는 목표보다는 스스로의 마음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진실로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는 것 같다.
이것이 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목표에 더욱 신경을 써야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아, 정말 오랫만에 퇴근 후에 집이 아닌 곳에서 사람들을 만났고
서로가 다른 생각들을 교류했지만 조금도 불쾌하거나 따지지 않았던
유익한 대화의 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