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노트/스케치북

어떤 중심 (부제 : 미친사랑)

길을 묻는 길냥이에게_the캣 2005. 10. 1. 03:27

1.

사실 모든 사람이 조금씩은 정신을 앓는다. 그러나 그래도정상이라고 말해지는 사람은 이 약간의 정상적이지 못함을 개선하려 애쓰는 사람일 것이다.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삶이 비틀거림의 연속임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애씀이 벅차다는 걸 어느만큼은 알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자기의 중심 안에서 비틀거리는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
L씨. 그는 서른넷의 여자 대학원생으로 1994년에 입학했다. 강의실에서 혼자 누워 노래부르던 그녀와의 어색했던 첫대면, 개강파티에서의 불규칙한 음정으로 에릭 클랩튼의 노래를 부를 때만 해도 사람들은 지금처럼 그녀에 대해 심각하지 않았었다. 수업시간에 어설픈 맑시즘이론으로 퍼부어대는 문제제기도 열성적이라는 말로 대신하면서 별로 문제가 있다고 보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한 사내를 사랑하면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받는 사내는 29살의, 대학원을 졸업하고 문학에 꽤 해박했던, 정신이 맑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2.

L씨는 첫눈에 그사람에게 반해버렸다. 학기 초 그나마 학업에 매달려 있던 정신의 약간은 정상적이었던 중심이 온통 그에게로 쏠려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사랑에 빠지면서부터 L씨의 이성은 일차원적인 욕망의 차원으로 끌어내려졌다.
L씨는 어느날부터인가 화장을 시작했다. 그 사내를 유혹해볼 요량으로 붉고 화려한 립스틱에 짧은 미니, 길다란 부츠를 자랑하면서 컴퍼스를 활보하고 다녔다. 그 동안에 그나마 그를 돌보아주던 몇 안되는 사람들도 모두 떠나버리고 그녀는 혼자가 되었다.
J씨-그녀가 사랑하는-는 늘 못생기고 나이도 많으며 정신이 이상했던 그녀에게 냉담했다. 어느날엔가는 몹시 화를 내고서 그녀와의 관계를 끝냈다고 나에게 말했다.
작년 가을쯤이었던것 같다. 상처입은 L씨가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방황을 시작한 것은... 붉고 화려했던 립스틱은 부분부분 얼룩이 지면서 광대처럼 우스운 꼴로 변해버렸고, 옷 매무새는 애써 외면해야 할 정도로 엉망이었다. 더우기 한 쪽 다리의 스타킹은 허벅지 중간까지 흘러내려가 있거나 찢어진 채로 드러나곤 했다. 울 학교 도서관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그녀의 시선은 늘 다른 곳으로 돌려져 제자리로 돌아올 줄 몰랐다.

3.

어느날 부터는 그녀가 대학원 건물 화장실에서 혼자 고래고래 악을 쓴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싸움이 난줄 알 정도로 큰 소리였었다고 했다. 그녀가 도서관에서 다시 대학원건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것은 포기할 것 같았던 사랑을 다시 시작한다는것을 의미했다. 아니, 그녀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투쟁의 시작이었다. 투쟁, 투쟁, 끊임없는 투쟁만이 살 길 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다만 그 투쟁의 대상이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는 부르조아나 남성지배계층에서 한 남자에게로 바뀌어져있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증상은 나날이 심각해져갔다. 어느 노부인이 자기를 계속 괴롭힌다고 했다. 자기가 길을 걸을때나 책을 보고있을 때마다 불쑥 나타나서 계속 말을 건다는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계속 혼자서 중얼거리며 지내는 사이 학교에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던 J씨도 학교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를 맞닥뜨릴때마다 백치와도 같은 괴상한 웃음을 흘리면서 그에게 다가섰지만 그때마다 J씨의 반응은 냉담했다. 보다 못한 주변 사람들이 J씨에게 권고를 했다. 학교에 더이상 나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럴 때에 그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4.

"이제 완전히 끝낼 겁니다."
친구가 주인으로 있는 까페 <자유시간>에서 만나자마자 그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선배, 언제나 그 말씀만 하실겁니까?"
"아닙니다. 정말 끝내기로 했어요. 조금있다 만나기로 했어요."
"만나서 뭐하시게요.."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할 겁니다."
"그런다고 되겠어요? L씨가 온전한 사람이라면 모를까..정신병원에서 계속 치료중이라면서요?"
"후, 별 효과가 없나봐요.."
"선배가 너무 마음이 좋아서 그래요. 뭐하러 자꾸 만나요? 서로에게 좋지도 않은데..아예 끝내려면 조금 상처가 있더라도 여기에서 끝내는게 좋아요.."
"......."
한동안 그는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저 남자의 속마음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 보다는 안쓰러움이 더했다.
"T씨...사실은 나도 정신병원에 있었어요...H대학 K박사라는 분에게 잠시 치료받은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그사람의 심정을 잘 알아요..그래서 함부로 그사람에게 대하지 못하는거구요"
"........................"

5.

그날, 그의 고백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대학원 재학시 누구보다 문학적이었고 학문에 열정적이었으며 또 시를 즐겨 쓰던 사람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그 처음의 충격은 곧 감동으로 변해갔다. 그는 그러한 사실을 처음으로 내게 털어놓은 것이었다. 그는 순전히 인간적인 심정으로 L씨를 동정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을 그렇게도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L씨를 막 대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자신의 얘기를 솔직하게 고백한 것은 그녀에게 이런저런 동정심 따위를 이젠 다 훌훌 털어버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후로 나도 L씨에 대한 동정심을 버리게 되었고 어떤 때에는 L씨가 미워지기도 했다.

6.

겨울이 왔다. 그동안 J씨는 방황을 했고 서울대 석사 시험을 다시 보는것으로 그 방황을 매듭지었다. 하지만 L씨는 여전히 둥글고 기미가 많은 얼굴에 붉고 화려한 입술 화장을 하고 긴 부츠에 짧은 치마로 오지 않는 J씨를 그리며 캠퍼스를 헤집고 다녔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결국, 중심이 문제였다. 김지하 시인이 어떤 의미로 '중심의 괴로움'을 노래했는지는 몰라도 내게 있어서 그 괴로움은 스스로 중심을 잡지 못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J씨와 L씨를 지켜보면서 약간 변화하게 되었다.
그들은 전혀 중심을 잡지 못하는듯이 보이면서도 나름대로의 중심과 싸워나가고 있었다. J씨에게는 서울대가, L씨에게는 J라는 사내가 중심이었다. 그들의 세계는 바로 그러한 중심을 축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중심이 없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는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었다. 나는 어떠한가...
나의 괴로움은 중심이 없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두 사람은 이미 나름대로는 중심을 이루고 있었고 그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또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는데, 내게는 그 치열한 싸움의 대상인 중심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중심을 잡으려 하는 노력은 이미 그 중심을 발견했다는 의미이지만 내 경우엔 아직 그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L씨보다는 희망적이라고 위안해본다. 사람을 중심으로 삼는다는 것은 어리석고 또 위험한 일이다. 게다가 L씨의 중심은 오히려 L씨 자신을 돌보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 오늘 연구실로 찾아온-사실 L씨는 매일 나에게 찾아와서는 멍하니 앉아있다가 간다- L씨를 반강제적으로 떠밀다시피 쫓아내면서 그녀가 '중심'을 다시 발견하게 되기를 기원했다. 사람이 아닌 다른 것에서.......

1995.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