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통채로 조작할 수 있는 건 시스템 밖에 없어.
이게 시스템이야.
시스템은 권력 앞에서 무력하지.
시스템 자체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권력 앞에서...
드라마 속 사기꾼이 국가권력을 움직여 본인의 신분을 타인으로 세탁해 전혀 다른 사람이 대신 형을 살게 하고 본인은 호의호식한다는 사실을 후배 판사에게 확인시켜주면서 주인공이 하는 대사.
힘있는 정치인들이 무능하다고 공무원들을 질타할 때, 또는 반대로 국민들이 무능한 행정이나 통치행위를 비판할 때 둘다 쓰이는 '시스템(의 부재)'라는 말을 뒤집어 생각하면 지적하는 자의 입장에서 비판받는 입장의 사람들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욕망의 다른 표현이 되기도 한다. 즉, 이 시스템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는 입장은 사용자 혹은 힘있는 자에 속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말하는 시스템은 본인들의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고 싶다는 표현이 될 수도 있다는게 내 생각.
나는 개인적으로 좀 다른 관점에서 시스템에 대한 맹신을 거부하고 반발하는 입장을 얘기했지만, 결국 이 대사가 전달하려는 핵심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에 주절주절 몇마디 개인적 성찰을 적어본다.
내가 속해있는 교육행정의 입장에서 보면 시스템을 외치는 자들은 주로 교수, 보직자 또는 상위기관 사람들이며, 주로 감사 등을 통해 하위직 또는 하위기관에 속해있는 사람들을 비판할 때 이 용어를 회초리처럼 꺼내든다. 그래서 막상 시스템을 구축해보면 하위직들은 그 시스템을 운영하고 내용을 채우느라 이전보다 몇곱배의 노동을 제공해야 하며, 행여 잘못 입력하기라도 하면 가차없이 징벌이 청구되는데 이는 주로 시스템을 요구했던 힘있는 자들이 취하는 행동이다. 추가 노동에 대한 대가나 시스템을 잘 운영하기 위한 인력충원 등의 노력은 아예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내 업무현장에서 '시스템'의 폐해를 직접 겪고 있기 때문이다. 십여년 전. 정보공시라는 대학정보시스템이 처음 구축될 때 별나게도 나는 반대의견을 냈었다. 교육행정 자체보다 숫자에 얽매여 업무의 근본을 잊게될까바 두려웠고, 향후 그 체계가 결국은 교육행정가들을 옭아맬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처음에 그 시스템을 만든 자들은 각 대학에 온갖 사탕발림식의 말들로 협조를 구했고 사람들은 하지 않았던, 예상치 못했던 추가 업무에 궁시렁대면서도 순순히 따랐다. 그렇게 수년이 흐르고, 상위기관 사람들은 갑자기 정보공시의 오류를 잡겠다고 난리치더니 모든 대학에 자체 점검을 시키고 잘못된 입력사항들에 대해선 수년 전 담당자들을 찾아내어 징계를 요구하고 해당 대학에 각종 불이익을 내렸다. 교내에 포털이 구축될 때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정보를 구축해야 한다며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결론적으로 업무의 양은 배로 늘었고 인력은 구축 전과 변함이 없었다. 결국 각 부서마다 늘어난 업무량과 업무시간 때문에 아우성이었지만, 소용없었다. 어떤 때에는 오히려 잘못 입력된 내용들로 인해 감사에서 지적받고 징계에 처해지는 사람도 생겼다. 교육행정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교육철학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그저 입력하는 기계처럼 일하는 사람들만 늘어가고 있었다.
시스템의 장점을 부정하자는게 아니다. 적어도 구축된 시스템이라면 잘 운영이 되어야 문제가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환경이 변화되는 부분에 대해서 잘 살폈어야 한다는 거다. 부동산 정책의 피해자는 늘 서민들이듯, 시스템 만능주의의 피해자는 최하층 근로자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 그리고 이런 현실을 이용해 힘있는 자들이 권력을 한층 더 강화하는 수단으로 시스템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걸 지적하고 싶었다.
시스템을 요구만 할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잘 작동하는지, 어떻게 해야 시스템이 잘 작동될 수 있는지도 고려해야 한다는 거다. 무엇보다 시스템 구축의 목적을 잊지 않아야 하고 올바르게 제시된 방향으로 개선되어 나가야 하며, 잘못 운영되는 부분에 대해서 수시로 점검하고 확인해야 한다. 국가 시스템에 대해서는 국민이 그 감시자 역할을 한다고 치면 되는데, 개별 교육현장에선 과연 누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