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공부할 때 얘기를 해볼까 해. 스물 다섯부터 두 해 정도의 일이지. 그때는 정말 열정적인 시절이었어. 마지막으로 해보는 공부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진지하고 절박했었지.난 그때 내가 정말 천재라고 말하고 다녔었어. 처음엔 다들 비웃었었지만 결국 몇가지 사건(?)들로 인해 조금은 나를 인정해주었었어.정말 난 못말리는 영문학도였던 것 같아. 참 많은 사고(?)들을 치고 다녀서 늘 사람들 대화의 주제가 되곤 했었지. 그래도 사람들한테 미움을 덜 받았던건 그들이 내게 꽤 도움을 받기도 했었거든. 이를테면 난 그때 도서관에서 거의 살다시피해서 전공관련 책들 뿐만 아니라 관련된 사회과학 서적들의 위치들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지. 그래서 사람들이 발표나 논문준비 등으로 관련 책들을 빌려야할 때마다 나를 찾아다녔어. 나를 통해 미리 책의 위치를 알고 가면 책을 찾는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었거든.그 덕분에 난 '워킹 라이브러리 Walking Library'라고 불리기도 했었지. 나의 총명함은 몇가지 에피소드들을 통해 사람들한테 인정받을 수 있었는데 그 얘기를 해줄테니 들어봐.
다른 사람들한테 미움을 받는 한 원생이 있었어. 그는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하려들지 않았고 심지어는 선배들의 인사조차 받지 않았어. 게다가 남들 발표할 때엔 왜그리 집요하게 질문을 퍼부어대던지.. 그러던 어느날, 그가 영미소설 시간에 발표를 하게 되었는데 그가 발표를 마치자마자 그동안 그에게 원망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질문공세를 퍼붓기 시작했지. 그는 사람들의 공격적인 질문들에 대해 격앙된 어조로 답변했고 그렇게 치열한 공방이 오고가던 중, 내가 손을 들고 일어나 화가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어. 당신의 발표자료 중 4쪽의 내용은 ㅇㅇㅇ가 쓴 책의 ㅇ페이지 ㅇ째 단락을 통째로 옮긴거요. 자신의 의견을 밝힌 것이라 하였는데 그건 거짓말입니다.자신의 생각을 서술했다는 주장은 취소하시오. 그것으로 모든 상황은 종료되었지. 원생들간의 논박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교수가 나의 한마디가 끝나자마자 상황종료를 선언해버렸거든.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지나친 감도 없진 않았지만, 거짓말을 한 것은 분명 잘못된 거였다고 봐. 내가 제일 혐오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거든. 남의 논문의 일부분을 토씨하나 바꾸지 않고 부분부분 짜깁기하는 그런 ...아무튼 그 일 이후부터는 나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긴 했어. 어떤 여자선배는 무섭다고까지 하더군.
내가 하는 발표는 어떠했을지 궁금하겠다. 1학기 때...풉.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데, 한편으론 정말 내가 진지했었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일이 있었어. 나를 특별히 총애해주시던 영시교수님 수업시간에 오든 Wystan Hugh Auden에 관해발표하게 되어 있어서 꼬박 밤을 새서 발표자료를 만들었었지. 전날 밤에 책상에 앉아서 시작한 작업이었는데 나중에 자리에서 일어나니 해가 뜨더군. 그런데말야, 그렇게 하얀 밤을 지새 만든 발표자료를 들고 난 결국 강의실에 들어가지 못했어. 내가 만든 자료에 대해 100% 만족이 안되어서 복도를 서성이다가 결국 결석을 해버린거지. 아주 난리가 났었어. 수업이끝난 후 평소 나를 시기하던 사람들이 다가와서 걱정해주는척하면서 그러더군. 너 왜 그랬어.. 교수님이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그러면 안되지.. 가서 용서를 빌어야하지 않겠니?발표자료를 들고 교수님을 찾아갔더니 30분동안 엄청나게 야단을 치시더라. 얼마나 내가 진땀을 뺐던지.. 그저 죄송하다고만 했지. 제출한 발표자료를 보신 후 한동안 말없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시던교수님이 서랍 속에서 무엇인가를 하나 꺼내서 건네주더군. 그건 ..박카스였어..그 날 이후 한동안 그 교수님의 제자가 되달라는 회유 때문에 좀 곤란해지긴 했었지 +_+
무엇이든 열중하고 몰두하다보면 혜안이 생기기도 하나봐. 무슨 말이냐하면 대학원생 대상 영어시험에서 5문제 중 4개를 내가 맞혀버렸거든. 어떤 교수가 출제하게될지와 출제가 예고된 영어교재-한 500여페이지 정도되는-의 목차를 분석해서 몇개의 에세이만 읽어보았는데 문제가 내가 읽었던 에세이들 중에서 대부분 출제가 된거야. 사람들이 놀라 자빠졌었지 하하. 그때 그들은 몇사람씩 조를 짜서 그 두꺼운 교재 전체를 통으로 번역하느라 용을 썼었거든. 난 다양한 계열의 학생들 대상 시험이고 교재 자체가 인문과학과 예술 영역을 총망라하는 에세이들로 짜여져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각 분야별로 가장 유명한 사람의 글들만 읽어봤었거든.
전공종합시험도 마찬가지였어. 영시와 영미소설, 영미희곡 각 분야의 교수님 성향과 주전공 작가들, 그리고 현대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 위주로 요약정리하고 시험을 치렀는데 각 분야별 출제문제를 다 적중시키고 만거야. 영미희곡의 경우, 교수의 석사전공이 미국표현주의극이니 그 대표작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car Named Desire]에 나타난 표현주의 기법들을 정리해보았고 영미시의 경우 현대작가 중 가장 중요한 티에스 엘리엇T.S. Eliot과 그의 시 [황무지 The Waste Land]에 관한 핵심을 요약해서 공부하는 식이었지. 그렇게 정리한 내용을 친한 사람들에게 미리 읽어보라고 주었었는데 심각한 걱정과 지나친 진지함에 억눌려 있었던 그들은 나의 '친절'을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갔다가 뒤늦게 안타까움을 느껴야했었지. 아무튼 그일은 나의 총명함에 대한 '총화'였다고 할만한 일이었어.
생각해보면, 이 때가 내 인생의 절정기였었나봐. 그 전, 그리고 그 이후 지금의 내 인생과 비교한다면 정말 '엄청난' 시절이었지. 심지어는 대학생활을 같이 했었던 아내마저 믿기 힘든 이야기이니.. 어머니가 파출부해서 벌어다주는 등록금을 받으면서도 조교생활로 얻는 월급의 반을 책 사는데 썼었으니 그 시절의 나는 분명 미친놈이었던게야.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이 때가 가장 행복했었어.
그 시절의 열정과, 연애과, 사람들 모두가 미친듯이 그리워 ...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리 속에 으례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았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 기법에 마저 서먹서먹 해진, 지성의 극치를 홀깃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精神奔逸者) 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半) ― 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 ― 만을 영수(領收)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 놓고 흡사 두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諸行)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끔 되고 그만 둔 모양이요. 굿바이.
- 이상의 소설 <날개> 도입부
Jerry C - 캐논(락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