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의무'를 다하고 나니, 또다른 무언가가 걸렸다.
가끔씩 안좋은 예감처럼 가슴을 싸늘하게 만드는 돌맹이 같은게 만져졌다.
이럴때면 통상 나는 음악을 듣곤 했는데
오늘은 워크맨마저 집 책상위에 놓고 온 터였다.
이렇게 음악마저 가까이 할 수 없으면 나는 음악 대신으로 소설책을 사곤 했다.
그래서 만나게 된 것이 신경숙의 <깊은 숨을 쉴 때마다>였다.
신경숙의 문장은 사람의 숨을 고르게 갈라놓는 듯해서 좋았다.
나는 그녀의 소설을 서너 페이지 읽을 때마다제목에서처럼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몇번 숨을 고르며 책을 읽다가 문득 내다본 창문 밖....
거기에그女가 서 있었다.
갑작스러웠다.
그女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인해 결국
평온하던 내 마음 속에서 온갖 감정들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잠시 난감해졌다.
실재하지 않는 그女의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불현듯
사진이 있었음을 생각해냈다.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이 몹시 부산해졌다.
아.....
그女는 제목이 없는 노트의 맨 뒷장에 숨어있었다.
그女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 그런 그녀의 무심함이 얼마나 날 미치게 했었던가, 후
사진이 들어있던 그 노트엔 일기가 낙서처럼 적혀있었다.
그女에게 사랑한다 고백하기 전후의,
짧았던,
그러나 내 생애중 가장 뜨겁고 강렬했었던
1994년 가을날의 내 감정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나는 뜨겁게 살아숨쉬는 젊은 영혼으로 그 노트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울컥....
그 기록들은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고 고통스럽게
내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채로 나는 그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잊고있었던 그女의 사진을 다시 꺼내어 보던 날....
1995.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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