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노트

혼자쓰는 회색노트7

길을 묻는 길냥이에게_the캣 2005. 10. 12. 18:27

1.

힘들게 잠을 이루고 오전 10시가 다 되어서야 끙, 하고 눈을 떴다.

방안은 안경을 벗어버린 내 시계(示界)에서는 고여있는 웅덩이물 속처럼 뿌옇게 보였다.

곧이어, 전날보다는 많지 않은, 그러나 여전히 눈부신 햇살들이 창틈새로 쏟아져 들어왔다.

방안이 온통 환하고 따스한 빛으로 가득했다.

그 빛들은 너무나 미세했고 고왔으며 가벼웠다.

수백초동안 나는 그대로 누워서 눈만 뜬채로 있었다.

밤사이 불면을 쫓느라 기력을 소진해서였을까...

요 며칠간 나는 아침마다 눈뜨는 일이 힘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도 그러했다.

어떤 알수없는 무력감이 내 어깨 양쪽을 무지막지하게 짓누른다거나 잠이 덜깬 내 영혼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느낌으로 내내 괴로웠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침부터 웬 비람, 하시며 싫은 내색을 하였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숙연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고보니 이런 날이면 나는 거의 정오 때까지 늦잠을 자곤 했는데....

아마 내가 눈을 뜨고 난 후부터 비가 내렸던 모양이었다.

일감호를 걸어오려니까 부지런 떨어 일찍 나서는 바람에 우산도 없이 등교했던 아이들이 비를 맞고 뛰어가고 있었다.

나는 한결 여유로워져서 임지훈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한겨레신문, 구십오년 삼월 삼십일일자 사회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기사를 읽어나갔다.

- 반장 시켜주고 1백만원 받아....

-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 총장 환호 속 축사

- 영석고교생 '교장퇴진' 농성

등등...

불현듯 콧날이 찡해왔다.

날씨탓이었을까...

계속해서 <영화 전태일>의 두 주연배우가 홍경인과 문성근으로 확정되었다는 기사와 영화 <말미잘>에 대한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의 평을 읽었고,

안치환 4집 앨범에 대한 내용과 <시민케인><네멋대로 해라> 등이 비디오로 출시된다는 소식을 읽었고,

'독사'탤런트 오욱철의 인간미에 대한 기사를 읽고 감동했다.

묘하게도 오늘 하루는 내게 많은 감동을 줄거라는 기대감을 갖게 했었다.

2.

해지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녀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부끄러워지고 후회가 생겼다.

나는 그녀를 내 소유로 하지 못해 얼마나 안달했었는가...

나는 나를 자랑스러워하지 못했었다.

그녀는 오히려 그런 나를 위로하며 남들앞에서 칭찬했고

내가 자학할때면 나무라는 대신 그저 말없이 미소지으며 곁에 있어줄 뿐이었다.

그럴때마다 나는 또 얼마나 자존심을 상해했었는지...

나는 아직도 바로 서지 못하고 흔들리며 상처만 줄뿐인데도

그녀는 나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있었다.

"이젠 내게서 벗어나"라고 말했을때,

"그래, 이제부터 너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건, 친구의 말대로 미련일 뿐이야"라고 대답하면서도 그녀는 다시 나를 찾아왔다.

때때로 그런 그녀를 보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내가 그녀를 떠나는게 아니라,

그녀가 나를 떠나게 되는게 더 두려웠다.

참담한 후회와 고통이 따르기 전에,

그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볼 일이다.....

3.

오전에는 어떤 알수없는 기대감이 차올랐었다.

연구실 창밖으로 비오는 교정을 내려다 보면서 '오늘 하루는 내게 감동적일 것'이라고 적었었다.

하지만...

하루 일과를 거의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금, 나는 몹시 지쳐있을 뿐이었다.

기대했던 감동 대신에 나는,

하루내내 내 기운을 뺏어가는 알 수 없는두려움에 맞서야 했고,

그로 인해 적지 않은 시간을 서성거리면서 보내야 했다.

고작해야,

두서너 페이지 분량의 논문 관계책을 읽었을 뿐이었다.......

1995.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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