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의 길을 가라
- 새아이들에게 부치는 말
"형, 뭐해요?"
과사무실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컴퓨터게임에 몰두해 있는데 후배녀석이 빼곰히 물을 열고 들어왔다.
"응, 보면 모르냐? 겜중이자나 ㅎㅎ"
"에이, 형,,게임하고 있음 어떡해요?"
후배 녀석이 질책조로 내뱉는 말이었다.
나는 그저 씨익 웃기만 했다.
"형, 신입생들 와있는데 형이 와서 학교 소개좀 해줘"
"어이구, 난 싫다. 신임 조교들 오면 부탁해봐라.."
"에이, 형두..그래도 고참 조교가 나서야 무게가 있죠 ㅎㅎ"
"어라? 임마, 난 이제 고참이 아니라 갈참이야. 곧 조교 그만둘 사람이라구. 그런 사람이 새내기들 봐서 뭐하것냐. 신임 조교들이 가야지,, 앞으로 마주칠 사람들이니까"
"네,, 그럼 다른 조교들은 어디갔어요?"
"응, 아직 안왔어. 어제 일찍 오라고 일렀는데..오는대로 보내주마"
"알았어요~"
그렇게 기분나쁘지 않은 실랑이를 하고 후배를 보냈다.
잠시동안 후배 녀석의 말들이 기분좋게 떠다녔다.
녀석들...
다섯 명의 영문과 조교들 중에서도 녀석들은 내게 가장 의지하려 든다.
그만큼 거리감도 없고 내가 편안해서일게다.
다른 본교 출신 조교들이 있기는 하지만 녀석들은 그래도 나를 가장 먼저 찾는다.
후배들의 그런 마음을 때로는 질책하고 때로는 달래기도 하면서
다른 조교들과도 친해질 수 있기를 바랬는데...
정오가 다되어가는데도 새 조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이 신입생들과 선(?)보는 날이라고 미리 일렀는데도 왜 안오는건지..
아침 11시부터 시작된 영문과 예비대학이 정오쯤에 끝날거라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계속 무심해질 수가 없었다.
비록 갈참조교였지만 나 또한 새내기들이 궁금했고
또 선배로서 계속 그들과 교류할 수 있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그랜 이유로 후배의 청을 거절은 했으면서도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306호강의실로
뛰어올라갔다.
"어, 형 언제왔어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잘 지내셨어요?"
"형, 늦었지만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내가 입구에 나타나자 준비를 도맡아 하던 후배들이 한마디씩 인사를 건네왔다.
"응, 그래, 다들 잘 지냈냐?"
짤막하게 대꾸하고 악수를 하고 잠시 복도를 기웃하다가 뒷문을 열고 빼곰 안을 들여다 보았다.
저 얼굴들,,
수줍음을 타면서도 기쁘고 즐거운 낯이 그대로 밝게 빛나는 저 순수한 얼굴들..
나도 한때는 저랬었지..
그들은 노래를 배우는 중이었다. 재학생들과 서로 마주 앉아서
기타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율동도 재미있게 곁들이고 있었다.
참으로
스무살의 청춘들은 슬프게도 아름다웠다...
이제 곧 3월이 오고 봄이오면 저들의 왁자함과 깔깔거림으로 온 캠퍼스가 출렁일터였다.
늘 캠퍼스의 봄은 그렇게 왔었다.
시국 때문에 분열히 떨쳐 일어서는 젊음의 한 켠에서 그들은 면죄부를 받은,
그리하여 자유와 기쁨이 흘러넘치는 특권층으로서 캠퍼스를 거침없이 돌아다녔다.
스무 살의 봄...
캠퍼스에서 그것은 그렇게 피어나이미 늙수그레한(?) 재학생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곧이어 4월이 왔고
그리하여 모든 만물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면 벛꽃과 목련이 이를 알렸다.
계속되는 술자리에 어느덧 새내기들은 농염해지고
해서 그들의 뺨은 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진달래를 닮아갔다.
모든게 행복하게 빛나는 청춘의 꿈들이 거침없이 선배들의 때묻은 의식을
치고 들어왔다.
나름대로 주체를 이루면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듯이 보이기에
그들의 삶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청춘은 고왔지만 스플게도 미완성의 노래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단단해 보이고 또 거침없이 세계를 받아치던 그 아이들의 패기는 결국
고뇌의 선상에서 조금씩 부서져갈 것이기도 했다.
인생과 인간, 세계에 관한 눈뜸에서가 아니라 이 고뇌는
처음엔 서툰 사랑에서부터 비롯될 것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이 될 것이었지만,
스무살의 열정적인 청춘들에게는 큰 격통을 줄 것이기도 했다.
비로서 그들에게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책임과 의무가 따를것이었다.
방황할 것이었다.
오늘 저 설익은 스무살의 청춘들을 보면서 나는
많은 추억들에 잠겨 눈을 감았다.
그 시절은 참으로 아프고 슬프고 행복했다.
이 아이들도 그러할 것이었다.
난 이 아이들과 어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좀 더 앞서갔을 뿐이었다.
곧 자라서 이들이 나와 곧 어깨를 나란히 하겠지만
그전까진 내가 이 아이들을 보살펴줄 수도 있을게다.
그리하여 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었다.
- 고뇌 속을 가라, 거침없이 가라, 혼자서 가라
어차피 인생은 고뇌의 연속이 아니던가...
지금 새아이들은 뒷뜰에서 농민가를 부르며 해방춤을 추고 있다.
어떤 기원을 품은 제식을 행하듯이....
199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