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캣생각

기형도 시에 관한 단상

길을 묻는 길냥이에게_the캣 2005. 10. 1. 03:31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메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 기 형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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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슬픔은 논리적으로 규명되어질 필요가 있다."

기형도 시의 한 부제에서 따온 이 구절은 내 삶의 테두리 안에서 새롭게 '규명'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 나는 여전히 슬픔 속에 살고 있고(기형도는 사실 '규명'은 않고 그 필요성만 강조했을 뿐이다), 내가 앓고 있는 이 슬픔에 대해서 어느만큼은 무지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왜 슬퍼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보다는, 이 슬픔이 때로는 아름답고 평화롭다는 느낌을 때때로 갖게됨을 의아하게 생각해왔고, 그 규명의 한 근거로 내 유년을 무덤헤치듯 파 볼 의도도 가지게 되었었다.
결국, 아무것도 '규명'된 것은 없다. 내가 앓고 있는 '슬픔'의 감정은 불쑥 불기둥을 치밀어 어찔, 내가 춤을 추고 있다는 환상까지도 갖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나는 슬픔에 익숙해있지는 않았다. 여태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한 무지 덕분에 지금껏 버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허나, 이젠 내 스스로 유리막처럼 나를 막아서 내 자신을 소외시키는 이 추레한 감정을 벗어던지고 싶다. . .

1994.5.23
-자작노트에 붙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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