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노트

회상

길을 묻는 길냥이에게_the캣 2005. 10. 1. 03:13

 

그여자는 참 선이 고왔다. 갸날픈 얼굴형에 긴 허리, 긴머리, 그리고 긴 목선이 참 고왔다. 요즘처럼 미인이 많은 세상이 그리 예뻤다고 말할 순 없으나 나에게는 그녀의 그 긴 몸선들이 참 곱게 느껴졌었다. 나는 언젠가 그녀와 보았던 베트남 영화 <그린파파야의 향기>에서 그녀의 목선을 또다시 느낄 수 있었다. 그 가느다랗고 가냘퍼보이는 그녀의 목선에 손이 가려는걸 가까스로 참았던 기억은 늘, 나를 피식 웃게 만들었다.

 

더불어 그녀의 표정은 늘 고요하면서도 쉽게 알아챌 수 없는 동요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푸석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녀는 얌전해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많은 호기심과 예술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틈만나면 나를 끌고 미술관과 영화관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중 종로의 한 화랑에서 보았던 김수영 회고전이 특히 기억에 남아 있다.

 

 

그녀는 예쁜 여자는 아니었지만 한때 예뻐졌다는 소리를 들었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아마 시기적으로 내가 그녀를, 아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품기 시작하고 한 달 쯤 후부터였던 것 같다. 어느날 그녀가 친구들을 초대하여 캠퍼스를 활보하는 것을 보게 되었었는데 그때 그녀의 모습은 한 마리 화려한 나비 같았다. 흔하게 볼 수 없는 아주 진기한 나비처럼 많은 사람들 틈에서 그녀만이 5월의 햇살에 화사하게 빛나보였다. 그날 오후 그녀가 친구들을 배웅하고나서 나를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던걸 기억하고 있다.

 

 

- 친구들이 나보고 많이 예뻐졌대...

 

그렇게 아름답고 황홀했던 그녀가 가끔씩 우울함을 비추는 경우가 늘어갔던걸 또한 기억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그늘이 생기기 시작했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절실해질 수록 그 그늘은 아주 무거운 장막처럼 변해갔다. 사랑은, 사람에게 희열과 고통을 동시에 주는 법이었다. 비록 이제는 남이 되어버린 그녀지만, 한때 그녀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마음은 즐겁기로 했다. 처음엔 그녀를 만날 수 없다는 현실이 우울하고 고통스러웠지만, 시간이 어느만큼 흐르고 나니 그녀의 아름다움이 새삼 돋아나고 그렇게 아름다운 그녀를 다시 기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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