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스크랩]‘명품조연’해부해보니…詩가 흐르고 있었네

길을 묻는 길냥이에게_the캣 2006. 4. 28. 09:49

오광록의 재발견 “그는 詩人이었다”

[조선일보 김미리기자]

'배우' 를 만나러 갔다가 ‘시인’을 발견했다. 오광록(44)은 내내 꿈꾸듯 말하고, 말하듯 시(詩)를 읊었다. 그는 인터뷰 장소도 한적한 성북동 골짜기, 소설가 이태준 선생의 고택을 개조한 찻집으로 잡았다.

그가 젊은 ‘길동무’(매니저를 이렇게 부른다)와 함께 까만 밴을 타고 미끄러져 들어왔을 때, 순간 누가 배우고 누가 매니저인지 헷갈렸다. 까칠한 수염, 흙먼지 뽀얗게 낀 구두, 남들보다 두 템포는 느린 말투, 흐느적거리는 손짓…. 연예인이 아니라, 도심에서 길 잃은 도사(道士)를 만난 느낌이다. 이런 오광록이 올 초 국내최대연예기획사 싸이더스HQ에 ‘최고령’으로 들어가 전지현, 정우성, 조인성 같은 톱스타와 한솥밥을 먹는다. “안 어울린다” 했더니, “내가 그들을 선택한 게 의외가 아니라, 그들이 날 선택한 게 신기한 거지요”하고 웃는다.


드라마 '닥터깽' 한장면만 나와도 강렬한 인상

프로인 ‘그들’이 ‘그’를 선택한 데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올드보이’에서 빌딩 옥상에서 자살하려다 오대수에게 넥타이를 잡힌 남자, ‘잠복근무’에서 “나 멋있지 않니” 내뱉던 흰머리 조폭, ‘흡혈형사 나도열’의 흡혈귀 전문 비오신부…. 오광록은 영화 줄거리는 가물가물해도 그가 나온 장면만은 오롯이 기억하게 하는 신비로운 조연이다.

대학로 연극판, 충무로 영화판에 또렷한 족적을 남긴 그가 최근 드라마 ‘닥터깽’으로 방송에 데뷔했다. 알코올중독 병원장 ‘봉은탁’ 역이다. “드라마는 시간 속에서 허겁지겁 뛰어가야 할 것 같아 망설였지요. 그런데 의외로 재미있어요. 일상 속에 다채롭게 날 던져놓을 수 있더라고요.” TV하고는 담쌓고 지내던 그, 처음으로 방송 시간 맞춰 TV를 켠다. 위성방송 없이는 공중파도 안 나오는 ‘성북동 산골짝(부촌 쪽이 아니다)’에 사는 터라 얼마 전 팔자에 없던 ‘위성접시’도 달았다.

봉은탁에 대한 집착은 단순한 애정 이상이다. “비어있는 듯하고, 한량 같은 인생을 살고, 때론 시도 읊는 소년 같은 무구함이 마음에 들어요.” 듣고 보니 봉은탁이 아니라 본인 얘기가 아닌가. 술도 그렇다. 오광록은 1년에 많게는 350일, 적어도 340일 술을 마시는 애주가다. 정작 알코올중독자를 연기하는 지금은 ‘120일밖에’ 못 마시지만.

"시는 나의 힘" 100편 넘게 써




배우가 업(業)이라면, 시(詩)는 삶 그 자체다. “중3 때 국어선생님 때문에 매일 신문 사설 읽었어요. 그때 시인 아니면 저널리스트가 돼야겠다 생각했지요.” 고3 때는 비만 오면 시집과 습작노트를 끼고 경춘선을 탔다. 그럴 때마다 지지리도 싫어하던 교련복을 입었다(방수에는 교련복이 최고였다나). “그때, 비 참 많이 맞았지….” 때마침 창밖에 비가 흩뿌린다. 오광록이 펜을 든다. 시를 휘갈긴다. 제목 ‘오래된 비’. 왼쪽 손에 잉크자국처럼 커다란 점이 보였다. “이거? 외계인 표시예요. 종족들만 알아보는 비밀 사인.” 피씩 웃는다.

“한 1백여 편 썼어요. 한번은 원고 몽땅 정리하려고 배낭에 넣고 무게 달았더니 20㎏ 되더라고요.” ‘게을러서’ 아직 시집을 내지는 못했지만, 작품은 이미 지인들을 통해 알음알음 입소문이 났다.

"난 나를 태워버리고 나타난 사람

시에 미쳐 산 고3 시절, 총 결석일수 34일. 결국 대학은 떨어졌다. 재수시절 우연히 배우예술원을 알았다. 하지만 시인·저널리스트와 연극배우. 달라도 한참 다른 길 아닌가. “다 독립군이지요, 야생이고, 라이브. 저널리스트가 사부작사부작 글 쓰고, 배우가 사부작사부작 연기할 수 있어요?”

오광록은 스스로를 ‘나타버린 사람’이라 했다. “‘나 타버린’, 즉 나를 태워버리고, ‘나타나 버린’, 안의 것을 자연스레 나타내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속눈썹에 자연스레 묻어나는 느낌으로, 바락바락 악 쓰지 않고 살아야지요.”

(김미리기자 [ mir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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