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휴식을 원하십니까?

길을 묻는 길냥이에게_the캣 2005. 10. 9. 11:43


휴식을 원하십니까?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보고

"당신은 휴식을 원하십니까?"

티비 화면속 S가 묻는다.

"네..."

속으로 대답하는 나..

하지만 영화속에선 내가 아닌 세연과 마리가 차례차례 숨을 멎어가고...

이 영화는

사람들에게 '휴식'(죽음)을 도와주는 작가겸 고민상담 카운셀러인 S의 글과 나레이션으로 진행된다. S가 사람들에게 휴식을 주려는 의도는 다음과 같은 그의 글에서 잘 나타난다.

'인간이 신이되는 길은 두가지가 있다. 창작을 하거나 사람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S의 글)

S는 글쓰기와 자살도우미를 병행하면서 그의 초월적 삶을 구현해간다. 그가 굳이 휴식도우미를 자청하면서까지 사람들의 자살을 돕는것은 누군가 돕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이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자전거 배우기와 같다. 누군가가 잡고있는 손을 놓으면 쓰러지고 마는....' (S의 글)

그의 도움에 의해 휴식을 택하는 인물들은 세연과 마리였다.

막대사탕을 진탕 빨아대는 술집여자출신 세연. 그녀에게 휴식은 불운하고 지긋지긋한 현실과 작별하고 평화를 구하는 그녀만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셈이었다고 하겠다.

전위행위예술가 마리의 경우는 좀 당황스럽다. 행위예술을 하며 한번도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기위해 자살을 택한다는 것이다.그녀에게 있어 죽음은 진정한 자아찾기의 구현방식인 셈이다.

그렇게 세연과 마리가 죽었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들은 어떤 모습일까.

세연을 사랑했던 총알택시기사 동식. 동생의 애인과 섹스하는 동식의 형이자 비디오아티스트 상현. 이들은 '휴식'과는 일단 멀어져있어 보인다. 동식은 사랑했던 세연을 통해 좌절과 분노를 느끼고 결국 S를 끝까지 추적하여 몽둥이질을 가하지만, 이미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그에게도 절망스런 삶으로부터의 탈출구는없어보인다. 그가 모는 총알택시처럼 동식의 인생도 한결같이 위태하기만 하다.

냉정하고 예술의식이 강했던 상현은 어떨까..그의 냉정함과 차가움은 행위예술 중 손목을 그어버리는 마리를 통해 여지없이 당황스러움으로 변해버리고 마는데...

세연과 마리, 상현과 동식이 펼쳐보이는 영화 속 현실은 지긋지긋하다못해 구역질이 날 만큼 단조롭고 막막해보이기만 했다. 세연이 상현과의 여행 중 혼자 뛰쳐나와 시골 영화관에서 보던 영화속의 한 대사처럼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것은 없다.'

이것이 이 영화의 진실이다.

-멀리 떠나와도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는 현실.

진부해보이고 단조롭고 따분해보이기까지하는 영화 내용처럼 참으로 '불편한 진실'인 셈이다.

영화 속 중간중간 보이는 섹스신과 에피소드들은 다 '거짓'이다.

결국 이 영화의 주제는 영화 초반 S의글에서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진실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거짓말은 사람을 흥분하게 만든다...'(S의 글)

이 영화 속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진실은 '죽음'뿐이다.

이것을 부정하게되면 스스로 택하는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 내려진다.

자살계약을 맺었다가 다시 살고싶다고 돌아선 10대 폭주족소년이

결국은 사고로 목숨을 잃게되는 현실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비극적 진실인 셈이다.

이렇게 '불편한 진실'과 불안한 동거를 하며 살아가는 영화 속 이 사람들이

언젠간, 아니 바로 지금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까 싶다

- 이 영화가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이유다.

Leonard Cohen - Everybody Knows

- 2005.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