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금은 가야국에서 만들어졌다.
왜 이 단순명료한 역사적 사실이 이제야 와닿는가..
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를 거의 다 읽었다.
우륵이 드디어 새로운 금(琴)을 완성한 대목에서
호흡을 고르느라 책을 잠시 놓기도 했다.
가야금의 완성은,
전쟁이 밥 먹듯이 이어지던 시대에 살면서
온갖 소리를 통해 세상만물의 흐름과 우주의 이치를 탐구해가던 우륵이
마침내 소리의 본질을 깨닫는 순간으로.
이 소설의 백미였다.
그 ‘근원적인 소리’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었다.
소리가 울렸고, 울리는 소리가 우륵의 몸속으로 들어와 흔들렸다.
그 소리는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소리였다.
그리고 지나간 모든 소리의 그림자들을 모두 끌어안은 소리였다.
소리가 소리를 불러냈고, 불러낸 소리가 태어나면 앞선 소리는 죽었다.
죽는 소리와 나는 소리가 잇닿았고,
죽는 소리의 끝자락에서 새로운 소리가 솟아,
소리는 생멸을 부딪쳐가며 펼쳐졌고 또 흘러갔다.
소리들은 낯설었고, 낯설어서 반가웠으며, 친숙했다(200쪽).
그동안 우륵의 이야기는 내가 처음에 길게 호흡을 잇지 못했던 것처럼 두서없이 보였다.
책 속의 표현처럼‘종잡을 수 없는’ 가야왕의 죽음과 죽은 왕과 함께 묻혀야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별로 새로운 사실일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게‘종잡을 수 없는’ 당혹감과 어이없음을 던져주었었다.
<현의 노래>에서는
피를 부르는 쇠(金)로서 세상과 우주를 통찰해가는 대장장이 야로의 이야기가
우륵의 가야금과 대조를 이루는 동시에
동일한 주제의 한 축을 이루며 전개되고 있었다.
우륵이 탐구한 완전한 소리의 완성이 가야금이라면
야로에게 있어 쇠의 완전한 형체는 날이었다.
야로가 말하는 날은
쇠가 완성되는 최후의 형태로서
‘한없이 얇아져서, 없음을 지향’하고
빈 것이되 ‘있음과 없음의 사이에서 가장 확실히 있는 것’이다.
또한‘그 위태로운 선 위에서 한없이 단단해야 하는 것’으로
‘쇠의 혼’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197쪽).
금(琴)과 금(金)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새는 달랐지만
이 두 사람의 정신은 한자의 음(音)처럼 유사했다.
병장기가 내는 소리는 날카로웠고 악기가 내는 소리는 깊었지만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와 날카로움이 극치를 더하는 병장기를 만드는 작업은
‘있음과 없음’이라는 우주적 명제를 탐구해가는 과정과 통해 있었다.
소리는 주인이 없는 것이냐?(이사부)
소리는 들리는 동안만의 소리고 울리는 동안만의 소리니 아마도 그러할 것이오.(우륵)
너희나라 대장장이 야로를 아느냐?(이사부)
가야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소(우륵)
그 늙은 대장장이가 말하기를, 병장기는 주인이 따로 없어서 쥐는 자마다 주인이라 하였다. 소리는 병장기와 같은 것이냐?(이사부)
소리는 없는 세상을 열어내는 것인데, 그 세상은 본래 있는 세상인 것이오.(우륵)
그러니 아마도 소리와 병장기는 같은 것인 모양이로구나(이사부)(251쪽)
이렇게 본질적으로는 유사한 삶의 형식과 주제를 공유했으면서도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소리와 병장기는 ‘없음’을 지향하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우륵과 야로의 운명을 통해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심성에 따라 결론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고 있다.
야로는 쇠의 성질과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난세에 목숨을 부지하고 양명(揚名)을 위해 쇠붙이를 이용했으며
결국 자기가 만든 도끼에 목숨을 내놓아야했다.
우륵은 소리는 살아있는 동안에만 의미가 있음을 잘 알았고
그래서 소리를 듣고 소리를 내기 위해 목숨을 구했으며
결국 살아남았다.
그래, 네가 나에게서 원하는 바가 무엇이냐?(이사부)
나를 그저 내버려두시오. 신라가 가야를 멸하더라도, 신라의 땅에서 가야의 금을 뜯을 수 있게 해주시오. 주인 있는 나라에서 주인 없는 소리를 펴게 해주시오(우륵)(252쪽)
이 두사람의 업보와도 같은 운명은
쇠와 소리, 사람을 죽이는 병장기와 사람을 일으켜세우는 악기가 갖는
자체의 고유한 특성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성질의 관계는
여러 고을의 소리를 따로따로 갖추라는 죽은 왕의 주문을 전하는 집사장의 말에 대한
우륵의 혼잣말에 잘 나타나 있다.
...소리는 본래 살아있는 동안만의 소리이고, 들리는 동안만의 소리인 것이오...집사장께서 이승과 저승의 사이를 헤아리지 못하시는구려. ...살아있는 동안의 이 덧없는 떨림이 어찌 능침을 평안케하고 북두를 진정시킬 수가 있겠소. 소리가 고을마다 다르다 해도 쇠붙이가 고을들을 부수고 녹여서 가지런히 다듬어내는 세상에서 고을이 무너진 연후에 소리가 홀로 살아남아 세상의 허공을 울릴 수가 있을 것이겠소? 모를 일이오. 모를 일이로되, 소리는 본래 소리마다 제가끔의 울림일 뿐이고 또 태어나는 순간 스스로 죽어 없어지는 것이어서, 쇠붙이가 소리를 죽일 수는 없을 것 아니겠소? 죽일 도리가 없을 것이고, 죽여질 리가 없지 않겠소?(93-94쪽)
밤기운이 제법 쌀쌀해졌다.
2000년대를 살아가는 나는
우륵이 듣던 강물소리, 풀벌레소리 대신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야로가 만들었을 수도 있는 자동차들의 엔진소리와
각종 기계들이 내는 소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들리지도 않고 들을 수도 없는 가야금 소리에
꼬박 하루를 내어준 셈이 되었지만
역사 속 인물 우륵으로 인해
허허로웠던 마음이 잠시나마 원기를 회복한 하루이기도 했다.
우륵이 주인없는 소리를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우륵은 금을 무릎에 안았다. 우륵이 오른손으로 맨 윗줄을 튕겼다. 소리는 아득히 깊었고, 더 깊고 더 먼 곳으로 사라져갔다. 우륵의 왼손이 사라져가는 소리를 들어올렸다. 소리는 흔들리면서 돌아섰고, 돌아서면서 휘어졌다. 우륵의 오른손이 다음 줄을 튕겼다. 소리는 넓고 둥글었다. 우륵의 왼손이 둥근 파문으로 벌어져 가는 소리를 눌렀다. 소리는 잔무늬로 번지면서 내려앉았고, 내려앉는 소리의 끝이 감겼다. 다시 우륵이 세 번째 줄을 튕겼다. 소리는 방울지면서 솟았다. 솟는 소리를 우륵의 왼손이 다시 들어올렸다가 내려놓았다. 내려놓고 더욱 눌렀다. 소리의 방울이 부서지면서 수많은 잔 방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다시 우륵의 오른손이 맨 윗줄을 튕겼다. 깊고 아득한 소리가 솟았다. 솟아서 내려앉는 소리를 우륵의 왼손이 지웠다. 지우면서 다시 우륵의 오른손이 세 번째 줄을 당겼다. 당기면서, 다시 우륵의 왼손이 소리를 들어올렸다. 올려진 소리는 넘실대며 다가왔다. 다가오는 소리를, 다시 우륵의 왼손이 눌렀다. 우륵의 몸이 소리 속으로 퍼져나갔고 소리가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몸은 소리에 실려, 없었던 새로운 시간 속으로 흘러나갔고, 흘러나간 몸이 다시 돌아와 줄을 당겼다. 열두 줄은 우륵의 손바닥에 가득 찼다. 손바닥 안에서 열두 줄은 넉넉했다. 우륵의 손가락은 열두 줄을 바쁘게 넘나들었다. 손가락들은 바빴으나, 가벼워서 한가해 보였다.(264-265쪽)
마음에 깊은 고요가 깃들었으나 잠이 쉽게 찾아들지는 못할 것 같다.
가야국의 멸망과 함께 우륵의 말소리가 계속 귓전을 맴돌았다..
소리는 가저런한 것이 아니다. 소리는 살아서 들리는 동안만의 소리이고 손가락으로 열두 줄을 울려 새로운 시간을 맞는 것이다.(283쪽)
소리는 제가끔의 길이 있다. 늘 새로움으로 덧없는 것이고, 덧없음으로 늘 새롭다.(285)
2005.10.6
독서후기.
박물관에서 오래된 악기를 들여다보는 일은
곤혹스럽고 지루한 일일 수 있다.
그것이 아이의 숙제거나 정해진 관광일정에 따른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물관에 전시된 가야금을 통해
이토록 놀라운 상상력을 펼쳐 보이는 작가의 역량이
매우 놀랍고 부러울 지경이다.
<칼의 노래>를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매우 내밀한 구성력과 섬세한 묘사력, 치열한 주제의식이 돋보이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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