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학교 다니던 시절,
내 글씨체가매년 바뀌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좋아하는 선생님의 칠판 글씨체나
좋아했던 친구의 필체를 따라서 했던 거였다.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시절..
한때 내가 줏대가 없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사람은 항상 타인의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말이 맞다는게 내 생각.
사람 인(人)이라는 한자 자체가 상호 의존하는 형태를 띄는 것이 다 의미가 있다는거다.
관계 속에서 항상 상호작용하면서 영향을 주고 받는게 오히려 당연한 이치였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아집이 넘쳐나거나 고집불통이거나 오만한 사람 또는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내 주변에서 보면 대개 늙은 이들이 그러했는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늙어서 허리는 구부러질지언정 정신의 유연성만은 잃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던 적도 있었다.
2.
개성이 넘치는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직장에서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초년병 시절부터상사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무능함과 게으름을 질타해오긴 했지만
돌아보면 알게 모르게 내 자신, 그들에게서 받은 영향들도 컸던 것 같다.
그 영향들 중에는 내게 독보다는 약이되는 경험이 더 많았다.
그들의 약점까지도 오히려 내게는 하나의 교훈이 되어주었었다.
첫 발령 부서의 상사 K.
이분은 전형적인 관리형 상사로서 최소한 그의 밑에서 일할때만은 크게 실수할 일은 없었다.
다만 자기와 동향의 내 동기를 더 편애함으로써 나와 불화를 빚었고
그로 인해 회사 내에서 나의 이미지가 고정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
비록고졸이었지만 그의 관리 능력과 경력은 충분히 존경받아야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요즘 그분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중이다.
H. 불같은 성질의 소유자. 다소 폭력적이라는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그의 밑에서 나는 꽤 요령있게
행동하여 그의 불같은 성질을 직접 받아내는 경험만은 피할 수 있었다. 뒷끝이 없다는건 그분만의 최대한의
강점으로 봐주어야 할 듯.
J. 유일한 스타일리스트 상사.
꽤나 멋쟁이여서 빨간 스카프를 목에 두르거나 머리카락 일부를 칼라풀하게 코팅하고 출근함으로써
팀원들을 즐겁게 해주었고 맥주만 즐겼던 낭만파 상사였다.
그러나 그분에 대한 호감은 몇가지 에피소드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으니..
그는 겉으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듯이 보였으나 결국엔 학연에 얽매여 특정 동료를 편애함으로써
나의 거센 항의를 받고 결국 내게 사과를 하였다.
또한 이건 나와 몇사람만의 비밀인데 그는 당시 업자로부터 의심스런 돈을 받은 경우가 있었으며
그 일이 나로 인해 탄로가 날 뻔했으나 겨우 무마가 되었었는데,
그것 때문에 홍보용으로 나온 상품을나를 따로 불러 주면서 은근히 비굴한 부탁을 하기도 했었다.
그가 무난하게 퇴직까지 한건 자신에겐 다행이었지만 내겐 영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말았다.
D. 지금껏 내게 가장 호평을 받을 만한 상사.
부하의 편에 서서 상사와 맞설 수 있는 몇 안되는 용맹한 전사이며
대신 일처리는 매번 화끈하고 분명하며 끝맺음이 확실했다.
모든 부하들이 잘 따를 수 밖에 없었으며
개인적으로 큰 욕심을 부리지도 않는 그런 분이셨다.
교직원의 가장 모범적인 타입.
Y는 나와 두번씩이나 같이 근무하는 인연을 맺은 상사였다.
현재의 부서로 나를 끌어주었던,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게는 커다란 실망을 안겨준 분.
화장실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가 했던 말들이 생각난다.
열심히 하라고, 자기가 끌어주겠다고 ...
결국 그 말들은 모두 공염불이었고 지금까지 내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어준 것이 없으며
일을 함에 있어서도 적극성 대신 회피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에 비하면 P는 매우 열정적이며 논리적이고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문제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탁월해서 내가 감탄할 때가 많았고,
현재의 내 일처리 방식도 그에게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언변 또한 매우 뛰어나서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질시를 받을 정도.
약점이 있다면 뒷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하고 비교적 인정이 없다는 거였다.
그런 인간적인 단점으로 인해 실망감을 느낀 적도 있었으나기획능력만은여전해 내가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지금껏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중.
L은 나와는 성향이 매우 다른 상사였다.
처음 같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사사건건 의견이 갈렸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그분의 의견을 많이 따르며 그의 성향대로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편이다.
내가 원칙주의자고 철저한 관리형이라면 그분은 처세에 능해서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융통성을 폭넓게 발휘했다.
그의 그런 일처리 방식에 대해 처음에는 매우 못마땅했고 비열해보이기까지 했었는데(실제로 그는 승진이 빨랐다),
그의 성실성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또한 사회가 변화하는 상황에서 그의 일처리 방식이 더 적합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러한 태도를 갖게된 데에는
나름대로 그분이 나의 방식에 대해 노골적으로 기분나빠하지 않고 참아준 것에도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안드는 그분의 말.
"조직이 까라면 까야지 별수있나?"
S는 내가 직장내 멘토로 삼은 유일한 존재였다.
그분을 알게된건 노조위원장 선거때였다.,
당시 모 음식점으로 몇몇 젊은 직원들을 초대해무릎까지 꿇어가며 도와달라는 태도를 보여줬을 때
나는 매우 놀랐고 나중에는 감동까지 했었다.
그런 태도는 아무리 목적 달성을 위한 것이라 해도 우리를 존중해주는 마음이 없으면 취할 수 없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의 밑에서 노조간부로 일을 하면서도 그분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었다.
늘 젊은 후배들이 우리 학교를 끌고가야한다며 얘기했고
다른 늙은 상사들처럼후배들을 뒷담화로 까대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런 그분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욕심(물욕)이라는 것은 머리로 쉽게 제어할 수 없는그런 성향인 것 같았다.
현 이사장을 옹립한 공신으로서 최고의 권력을 가지게 되었으면서도 돈에 대한 욕심을 제어하지 못해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나로선 커다란 실망감 이상의 좌절감을 안겨준 사건이었고,
그날이후로 나는 멘토없이 홀로이 서야하는 외로운 처지로 남아있다.
3.
멘토 없이 홀로 선다는 것은 매우 외롭고고독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으며 결국 홀로 서야만하는 존재.
인생의 시기로 구분했을 때 내 처지가 바로 이쯤이라고 인정하는 중이다.
나는 요즘 그래서 후배들을 많이 접하는 중이다.
그들을 통해 내가 어떤 선배가 되어야하는지를 다시한번 곱씹어보면서
그들에게 존경받기 위해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해야하는가를 자주 생각하고 있다.
내가 요즘 중간자로서의 조정 역할을 많이 하는 것은
중간관리자로서의 위치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여기에 이유가 있었다.
나는 후배들에게 경쟁과 이기심의 표상이기보다는
상생과 협조의 존재로서 남고 싶었다.
결점 많고 헛점 투성이인 늙은 상사들마저 포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에게 투쟁적이고 고집센 이미지 대신
예의바르게 의견을 주장할 줄 아는 후배로 기억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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